고생물학 이야기

고생물학은 남성만의 학문인가(1). 19세기 여성 고생물학자 매리 애닝

화석사랑 지질사랑 2020. 10. 18. 20:34

 

 저는 유치원에서 사회복무요원으로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유치원 선생님들은 모두 여성이었고 학부모님들부터 선생님 소리를 듣는 사람 중에선 저 혼자만 남성이었지요.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이들을 집으로 보내고 선생님들과 이야기 시간을 가졌었는데, 마침 이야기 주제가 연애였습니다. 선생님 한 분이 저에게 물어봤습니다. "선생님은 뭐 화석, 지질학 이런 거 좋아하시는데, 여자들은 그런 거 싫어하는 거 아세요? 만약 선생님 여자친구가 '공룡이야? 나야?'라고 물으면 뭐라고 답하실 건가요(이때 제가 무슨 답을 하였는지는 기억이 나지를 않네요.)?"

 비슷한 이야기를 예전에도 들은 기억이 있었습니다. 대학교 기숙사에서 다른 과 형들과 연애 이야기가 나오다가 '공룡 좋아하면.. 그쪽은 여성을 만나기 힘들 거 같은데?'라는 이야기를 들었지요.

 언뜻 보기에는 그렇게 보이는 거 같기도 합니다. 우리의 머릿속에서 공룡 하면 보통 남자아이들이 좋아하는 생물이며 여자아이들은 공룡에 큰 관심이 없고 성인이 되어서도 남자의 일부만 어린 시절의 향수를 잊지 못하고 대다수 여성은 관심이 없는... 그런 이미지가 연상되지요. 그런데 실제로도 그럴까요? 과연 여성은 고생물학과 인연이 없으며 기여한 바가 없는 걸까요?

 

비운의 위대한 고생물학자

  최근에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되었습니다. 크리스토퍼 유전자 가위라고도 하는 유전자 편집 연구를 한 공로가 인정받아서 두 과학자가 상을 받았지요. 그 위대한 과학자분들은 모두 여성이었습니다. 여성 과학자의 입지가 조금씩 성장해가는 것 같습니다.

 이럴 때에 생각나는 고생물학자가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읽었던 공룡 만화책에서 처음 들었던 이름인데, 바로 매리 애닝이라는 고생물학자입니다.

매리 애닝의 초상화. 옆에 있는 강아지는 그녀가 화석을 찾으러 갈 떄 항상 데리고 다녔던 그녀의 애완견으로 이름은 '트레이'이다. 안타깝게도 1833년 트레이는 화석발굴을 하러 나갔다가 절벽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었다. 출처-https://en.wikipedia.org/wiki/Mary_Anning

 매리 애닝은 18세기에서 19세기 중반에 영국에서 활동하였던 고생물학자였습니다. 목수의 딸로 태어났던 그녀는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가난한 집안이었기에 돈벌이를 위해서 여러 일들을 하였으며, 화석 발굴 및 판매도 그 일 중 하나였습니다. 이 일은 그녀가 11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난 후에도 계속해서 진행되었습니다. 그녀가 화석을 발굴한 주요 지역은 웨일즈의 동남부에 위치한 블루 라이언스 절벽이었습니다. 이 절벽을 이루고 있는 지층의 연대는 2억 년에서 1억 9천 5백만 년 사이로 트라이아스기 후기에서 쥐라기 초기에 형성된 지층이었지요. 지층의 주요 암석은 탄산염 성분으로 이루어진 석회암이며 진흙으로 만들어진 이암과 셰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블루 라이어스 절벽. 매리 애닝은 이곳에서 여러 화석을 발굴하였다. 출처-https://en.wikipedia.org/wiki/Mary_Anning

 첫번쨰 발견은 그녀가 12살이었던 1811년에 이루어졌습니다. 매리의 오빠였던 조셉 애닝이 블루 라이어스 절벽에서 이크티오사우루스의 두개골을 처음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신체의 다른 부위도 매리에 의해서 발견되었지요. 이크티오사우루스는 돌고래와 비슷하게 생긴 파충류로 여러 공룡 책에서 소개되는 해양파충류입니다. 매리와 조셉이 발견한 이크티오사우루스는 노스포크주의 샌드링엄에 살던 귀족인 헨리 호스트 헨리(Henry Hoste Henley)가 23파운드에 구매하였습니다. 그리고 1819년에 경매에 넘어가서 45파운드 5실링에 판매되어 대영박물관으로 소유권이 넘어가고 이크티오사우루스라는 학명도 명명되었습니다.

 1823년 10월에는 또 다른 발견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번에는 목이 긴 파충류였습니다. 우리가 대중매체에서 흔히 보는 바로 그 수장룡, 플레시오사우루스의 화석이었지요.  발견된 화석은 머리도 잘 보존되었고 긴 목과 4개의 지느러미, 신체 골격이 매우 잘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가장 온전히 보존된 플레시오사우루스 표본이었지요. 이 화석은 윌리엄 코니베어라는 지질학자가 연구하여 플레시오사우루스 도리코데이루스(Plesiosaurus dolichodeirus)로 명명되었습니다. 이 표본은 지금까지 플레시오사우루스 도리코데이루스종의 모식표본(어느 생물 종의 기본적인 표본.)으로 남아있습니다.

매리애닝이 그린 플레시오사우루스의 골격 스케치와 윌리엄 코니베어에게 보낸 편지. 출처-https://en.wikipedia.org/wiki/Mary_Anning#Plesiosaurus

 1828년에 매리는 익룡의 화석을 발견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프테로닥틸러스로 명명되었고 후에 디모르포돈으로 명명된 이 화석은 영국에서 최초로 발견된 익룡 화석으로 대영박물관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기도 하였습니다.

매리애닝이 발견한 익룡의 골격 스케치. 출처-https://en.wikipedia.org/wiki/Mary_Anning#/media/File:Pterodactylus_macronyx.jpg

1824년에는 분석에 대해서 처음 아이디어를 내놓았습니다. 분석이란 생물의 배설물, 그중 대변이 화석으로 된 것으로 생물의 식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화석입니다. 그런데 분석은 미끌미끌한 생김새 덕분에 본래 위석, 몇몇 생물이 섭취한 음식물을 소화하기 위해서 삼킨 돌로 여겨져 왔었지요. 그런데 매리는 그것을 깨 보면 안에서 작은 어류의 뼈 화석이나 비늘 등이 발견되는 것을 근거로 그것이 배설물이 아닐까 하는 판단을 하게 되었지요. 그녀는 자기 생각을 친했던 학자 윌리엄 버클랜드에게 알렸고 버클랜드는 1829년 분석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분석. 본래 위석으로 여겨져 왔으나 매리 애닝덕분에 배설물인 것으로 밝혀졌다. 출처-https://en.wikipedia.org/wiki/Coprolite#/media/File:A_large_coprolite_(fossilized_feces_or_dinosaur_poop)_from_South_Carolina,_USA..jpg

1826년에 매리는 현재 살아있는 오징어의 조상뻘인 생물인 벨렘나이트라는 생물의 화석에서 먹물주머니를 발견하여 이들이 오징어나 갑오징어처럼 먹물을 내뿜을 수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본래 벨렘나이트는고대인들에게는 신이 더진 번개가 흔적으로 남은 것으로 믿어져 온 화석으로 덕분에 두족류(오징어를 포함하는 생물)들은 쥐라기 시기서부터 현대까지 먹물을 뿜어서 포식자로부터 자신을 방어해왔음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매리는 그녀의 친구 엘리자베스 필폿에게 이것을 이야기 하였는데, 엘리자베스는 여기에 아이디어를 얻어 벨렘나이트의 화석에 물과 잉크를 채워서 화석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업적들로 인해 그녀는 유럽과 북미에서 명성을 쌓았습니다.

벨렘나이트 화석. 출처-https://en.wikipedia.org/wiki/Belemnoidea#/media/File:Phragmoteuthis_conocauda.JPG
벨렘나이트 복원도. 출처-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BelemniteDB2.jpg

  

 안타까운 점은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당대에 매우 무시 당하는 처지였습니다. 오늘날에도 비판받는 성차별 문제로 인해서 차별받았고,  동시에 그녀와 그녀의 가족은 당시 영국에서 주류 교단이었던 국교회 신자가 아닌 침례교 신자였습니다. 성차별뿐만 아니라 교단이 다르다는 이유로 매리 애닝은 많은 차별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녀와 알고 지내던 작가 찰스 디킨스(올리버 트위스트 등 여러 작품을 써낸 그 작가 맞습니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세상은 저에게 불친절 해왔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다른 사람들을 의심하게 되었고, 그것이 두렵습니다."

 

 여성이었다는 점, 그리고 당시 영국의 주류 교단이었던 영국 국교회가 아닌 비국교회 신자였다는 점 때문에 그녀는 오랫동안 런던 지질학회에 가입조차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여성이 런던 지질학회에 가입이 가능해진건 1904년에 들어서서였죠. 매리 애닝이 사망하고 난 이후였습니다.

 매리 애닝은 1847년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인 1865년 찰스 디킨스는 잡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하며 그녀를 추도하였습니다. "목수의 딸은 스스로 자신의 이름에 명성을 쌓았고, 그럴 자격이 있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고 163년이 지난 2010년 9월 11일,  영국의 왕립학회에서 그녀를 과학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10명의 영국 여성에 포함하였습니다. 

독일 튀빙겐에 있는 고생물학 박물관에 전시된 플레시오사우루스류의 화석. 2012년 이 화석에 매리 애닝의 이름 딴 애닝가사우라 라는 학명이 붙여졌다. 출처-https://en.wikipedia.org/wiki/Anningasaura#/media/File:Hydrorion_brachypterygius_skull.JPG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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